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클렘페러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youtube(aoozdhcrIK8)]}}} || || 1961년 인터뷰 || * 그는 말러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[[부르노 발터]]와 함께 말러를 활발히 연주하며 그의 작품을 알린 선구자 중 한 명이었지만, 말러의 모든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. [[교향곡 제1번(말러)|교향곡 1번]]은 '4악장이 어리석게 질주한다'는 등의 이유로 평생 1번만 지휘했으며, [[교향곡 제3번(말러)|교향곡 3번]]은 매우 싫어했고, [[교향곡 제5번(말러)|교향곡 5번]]은 1악장만 좋아했으며[* 덤으로 클렘페러는 3악장(스케르초)은 너무 길며 4악장(아다지에토)은 살롱음악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. 실제로 말러 5번의 3악장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긴 스케르초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.] [[교향곡 제6번(말러)|교향곡 6번]]은 말년에도 이해를 하지 못했고, 교향곡 7번도 공개적으로는 1922년에 단 1번만 지휘했다. 그래서 [[EMI Classics|EMI]]에 남긴 전곡녹음도 4개의 교향곡(2, 4, 7, 9)과 대지의 노래 뿐이다. 오히려 그는 1960년 후반 갑작스런 말러 열풍이 불면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말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러를 듣고 좋아하는 척 한다며 세태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했다. * [[1960년]]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기처럼 말러와의 인연이 있는 당대의 명지휘자이자 [[브루노 발터]]에 대해 '그는 로맨티시스트였어요. 정말이에요. 나는 모랄리스트가 아니지만 그는 확실한 모랄리스트였죠.'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. *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1959년에 녹음한 베토벤의 [[교향곡 제5번(베토벤)|교향곡 5번]]의 1악장은 [[1977년]]에 [[보이저(탐사선)|보이저]] 1호와 2호에 실린 [[골든 레코드]]에 실리게 되었다. * 클렘페러의 사촌인 빅터 클렘페러(Victor Klemperer, 1881~1960)는 [[언어학자]]로 일했으며, [[제2차 세계 대전]] 내내 독일에 머물렀음에도 아내인 에바(Eva)가 순수 '아리안' 독일인이었던 덕분에[* 참고로 나치는 정말 의외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간의 강제 이혼은 효과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,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.] 나치의 감시를 받는 등의 고초를 겪긴 했어도 [[홀로코스트]]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. 이후 빅터 클렘페러는 [[동독]]에서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[[1947년]]에 나치의 선전 언어에 대해 다룬 '제3제국의 언어: 문헌학자의 노트(LTI - Lingua Tertii Imperii: Notizbuch eines Philologen)'를 출판했으며, 1995년에는 나치 시대 내내 [[제3제국]] 하에서의 생활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쓴 빅터 클렘페러의 일기가 출판되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